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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야훼님 전상서

푸른은총 2018. 4. 1. 10:56

 

야훼님 전상서

 

                                      / 고정희

 

야훼님,
한 사나이가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오랜 추위와 각고를 끝낸 사나이가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아주 멀리 떠날 줄 알았던 그,
이제는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줄 알았던 그 사나이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섬광같은 눈빛을 간직한 채 그의 기원을 묻어둔 집으러 돌아 왔습니다.
그가 돌아 왔을 때 영원히 닫긴 줄 알았던 기도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가 돌아 왔을 때 영원히 끝난 줄 알았던 자유의 휘파람 소리가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돌아 왔을 때 우리들 기다림이 불기둥으로 일어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야훼님!
그가 돌아온 <마을과 지붕>은 아직 어둡습니다.
그가 돌아온 <교회당과 십자가>는 더더욱 고독합니다.
그가 돌아온 <들판과 전답>은 이 무지막지한 어둠과 추위 속에 누워 있습니다.
우리가 저 대지의 주인일 수 있을 때까지<재림하지 마소서.*>
그리고 용서하소서.
신도보다 잘 사는 목회자를 용서하시고
사회보다 잘 사는 교회를 용서하시고
제자보다 잘 사는 학자를 용서하시고
독자보다 배부른 시인을 용서하시고
백성보다 살쪄 있는 지배자를 용서하소서.


* 김광규의<연도>에서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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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희(高靜熙)

 

 

고정희는 1948년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광주 YMCA 대학생부 간사와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을 지내면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자유, 사랑, 정의 실천의 정신으로 대학생 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그녀는 1980년대 초부터 여자와 남자가, 그리고 아이들과 어른들이 서로 평등하고 자유롭게 어울려 사는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여성주의 공동체 모임인 <또 하나의 문화>에 동인으로 참가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해 나갔다. 
운동가의 강인함과 시인의 열정 및 섬세함을 동시에 갖춘 고정희는 훈련된 지도자의 역량으로 <여성신문> 초대 주간을 맡아 명실상부한 여성주의적 대안 언론의 초석을 튼튼히 다진다.
고정희를 한국문화사, 여성문화사의 한 중요한 모범으로 기리고자 할 때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시인으로서 고정희가 이룩한 업적이다. 고정희는 한국에서 페미니즘 문학이라는 개념을 최초로 정립하고 그 뛰어난 실천적 전범을 보였던 작가였다. 한국 문학사에서 고정희 이전에 '여성의 경험'과 '여성의 역사성' 그리고 '여성과 사회가 맺는 관계방식'을 특별한 문학적 가치로 강조하고 이론화한 작가는 아무도 없었다. 고정희가 없었다면 한국문학사에 페미니즘이라는 중요한 인식의 장은 훨씬 더 늦게 열렸을 것이다.

시인 고정희는 1975년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온 이래 15년간 <실락원 기행>, <초혼제>, <지리산의 봄>,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 <여성해방 출사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여백을 남긴다> 등 모두 10권의 시집을 발표한다. 고정희의 시세계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지상실현을 꿈꾸는 희망찬 노래에서부터 민족민중문학에 대한 치열한 모색, 그리고 여성해방을 지향하는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적 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적 탐구와 정열을 감싸 안는다. 그리고 그 모든 시에서 생명에의 강한 의지와 사랑이 넘쳐난다. 고정희의 이와 같은 치열한 역사의식과 탐구정신은 5. 18 광주 항쟁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즉 그녀는 전통적인 남도 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와 민중의 고난과 그 고난 속에서 다져지는 저항의 힘을 힘차게 노래하였던 것이다. 현실사회의 개혁과 더불어 새로운 글쓰기의 혁명은 이처럼 고정희에게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삶의 지향점이었다. 
이토록 정직하게, 줄기차게, 자유를 향한 이념을 불태우며 민족, 민중, 그리고 여성의 해방을 위해 노력한 고정희의 문학가로서, 여성운동가로서의 실천은 한국 문학사에 대단히 중요한 귀감이 될 것이 틀림없다.

출처 : ♡ 영혼의 설레임
글쓴이 : 마을촌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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